『리어왕』이 비극일 수 밖에 없는 이유
‘사랑’ 사전적 의미로 ‘아끼고 베풀며 따뜻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는 의미이다. 흔히 사랑에는 조건이 없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에 대한 보답을 원한다. 장식이 붙을수록 그 사랑이 더 위대했던 것을 증명이나 하는 것처럼. 여기 아비에 대한 사랑을 강요하다 자멸해 버린 왕이 있다.
아주 오랜 옛날 한발짝만 나가면 거친 자연환경과 맞부딪치던 시절. 왕은 강력한 리더쉽으로 왕국을 잘 꾸려왔다. 수많은 반란과 외부의 침입에도 굳건하게 수십년간 통치하던 왕은 이제 80대의 노구의 몸으로 정치에서 물러나려 한다. 그에게는 그 동안의 노고에 대한 당연한 감사와 영광의 월계관이 씌어져야 할 것이다. 더욱이 왕이라는 명예만을 남기고 왕국 분할을 포함 모든 권리를 세 딸들에게 나눠주려 하는 것이다. 그녀들은 생명을 부여해준 아버지로서도 왕에게 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의 영광을 그에게 선물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 리어는 당연한 요구를 하고 있다.
불운의 불씨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몸은 쇠약해졌지만 자부심 충만한 왕은 ‘내가 이렇게 하니 너희들은 그렇게 해주는 것이 도리이다’라는 식으로 요구한다. 첫째, 둘째는 충실히 아버지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만, 셋째는 허위의 말로써 영광을 치장하고 싶지 않다. 성난 왕은 제일 사랑하던 막내딸을 내치고 왕국은 첫째, 둘째에게 돌아간다. 그는 왕으로서의 품위는 지키면서 여생을 두 딸들집에서 번갈아 가며 편히 지내고자 한다. 제 몫을 챙긴 딸들은 그 동안의 복종은 다 끝났다는 듯 배반의 행동을 하고 두 딸들 사이도 각자의 욕망으로 파멸해간다. 왕은 절망과 복수심으로 광란의 들판을 질주하다 막내딸의 죽음으로 결국 그의 생도 끝난다.
이심전심 우리는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이 맘을 기대한다. 나를 다 주었다고 여겼을 때 그에 응당하는 보답이 오지 않았을때의 절망감은 오히려 나만을 위한 이기심때문은 아니었을까? “가진 돈을 전부 보이지 말고, 아는 것을 전부 말하지 말라. 가진 돈을 전부 빌려주지 말고, 걷기보다는 말을 타고, 들은 것을 전부 믿지 말라. 가진 돈을 전부 걸지 말고, 술과 계집 다 버리고, 집안에 잔뜩 틀어박혀 있으면, 20실의 원금으로 그 10할, 10실의 곱 벌기는 식은 죽 먹기지.”(1막, 55~56쪽 광대의 대사)
가진 것을 다 주었다 해도 내 목숨까지 준 것은 아니며 다 주었다 할 만큼 소중하다면 상대에 대해 내가 요구할 것은 없을 것이다. 예단과 집착 이것이 우리를 불운하게 만든다. 나르시스트 리어왕도 절대선을 고집하는 듯한 원리원칙의 소유자 코딜리어도 경직된 사고 때문에 금이 간 상황을 봉합하지 못하고 끝내 산산조각내 버리게 되는 비극을 만들었다. 물론 두 딸의 악은 비극의 커다란 원인임에는 틀림없다. 진정성없는 허위는 잘못된 것이지만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왕은 막내 코딜리어를 스스로 말하듯 제일 사랑했다. 언니들도 인정한다. 왕은 코딜리어의 어떤 점을 사랑했을까. 정직하고 거짓된 말을 못하는 그런 성격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막상 그 꾸밈없는 진심이 왕 자신에게 향했을때는 다른 이에 대한 똑같은 기준이 이 특별한 아비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 불가해한 현실속에서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 권선징악을 바란다. 당연히 코딜이어의 죽음은 왕과 이기적인 두 언니의 줄다리기속에서 희생양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코딜리어의 죽음이 증명해 주는 것은, 정의의 이념이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적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리어가 토해 낸 질문에 답을 하자면, 자연의 시각에서는 코딜리어의 목숨이 쥐의 목숨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그녀의 죽음과 쥐의 죽음은 똑같이 하찮은 일일 따름이다.” (키이넌 라이언 – 리어왕 서문에서) 자연만물의 생사속에서 인간만이 생사에 특별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생각 이것이 우리를 자만하게 만든다.
“아,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 시시각각으로 죽음의 고통을 맛볼지라도 단번에 죽어버리기보다는 나으니까요! - 미치광이 거지의 누더기를 걸치고” (5막, 269쪽 에드거의 대사) 심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고통과 고통, 통증과 통증사이 잠깐의 휴식기처럼 행복한 순간이 있다. 진통제에 의한 것이든, 생존 때문에 육체노동의 강도가 세서 정신의 휴지기가 생기는 그러한 순간. 그 순간에 잠시지만 삶의 환희를 보는 기회를 늘려나가야 한다. 결국 그 기회가 다른 불운을 압도할 수 있도록. 찰리 채플리니 말하듯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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