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다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보는 법을 배우다.
레미먼드 카버의 대성당
나는 아내 친구의 방문이 마뜩찮다. 나보다 그가 아내와 더 잘 통하는 것이 질투나서일까. 눈이 안보이는 것이 더욱 마뜩찮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죽은 아내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얼굴에 나타나는 심경의 변화, 화장을 했을때의 아름다움..), 세상 또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 정작 나는 아내의 말에 시큰둥했고 제대로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쓸쓸하고 적막한 도시 풍경. 내재적 외로움, 고독감이 배어있는 사람들. 같이 있어도 홀로 있는 듯한 소통의 부재, 공감하는데 어려운 이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모습들이다. 대성당을 읽고 난 후의 감정과 겹친다.
실업자가 된 후 붙박이 가구가 되어가는 남편의 무기력한 ‘보존’
이상하고 기이했던 거리 두고 싶었던 것들이 특별한 것이 되어 변화가 일어나는 ‘깃털들’
보지 못하는 이로부터 배우는 진짜로 보는 법 ‘대성당’
상실의 슬픔이 타인과의 소통, 공감이 되는 변화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귀가 막히는 상황에서야 아내의 모습을 새롭게 보게 되는 상황 ‘신경 써서’ 등등...
대성당에 나오는 인물들은 특별할 것 없는 보통사람들이다. 경제적으로 쪼들리거나 알콜중독인 경우. 인생의 활기는 찾기 힘들고 타인과의 소통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모습에서 꿈, 미래의 비전, 용기 등 우리가 인생에서 찬양하는 단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읽고 나서 짙은 여운이 남는다. 왜일까. 바로 우리 삶이 그렇기 때문이리라. 인생이 우리가 의도하는 대로 풀리지도 않고 지금 이 상황이 반드시 나의 맘과 행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콘에서 한 남자가 얼어가고 있다. 상상해보라. 불을 피우지 못하면 실제로 얼어서 죽어버리게 되는 한 남자를. 불이 있어야만 양말과 다른 것들도 말릴 수 있고 몸도 덥힐 수 있다. 그는 불을 피우지만, 그때 또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뭇가지 위에 쌓여 있던 눈이 그 위로 떨어진다. 불은 꺼진다. 그러는 동안 날은 더욱 추워진다. 밤이 다가오고 있다.”(200쪽, 내가 전화를 거는 곳)
절망앞에 출구는 없어 보인다. 그래도 뭔가는 해 보고 안 되면 다른 무엇도 시도해 봐야 하는 것이다. 삶의 대단한 의미, 삶은 이래야 한다는 정답지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인생에 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시도하고 때론 내 몸 보존하기 위해 웅크리기도 해야 할 것이다. 다만 멈추지 말고 계속해 보는 것이 정답이다.
“어쨌거나 뭔가 하긴 해야지. 일단 이것부터 해보는 거야. 만약 그래도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그게 인생이야. 그렇지 않아?” (163쪽, 신경써서)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나, 이 사람아? 그러기에 삶이란 희한한 걸세, 잘 알다시피. 계속해 멈추지 말고.”(309쪽, 대성당) 늦은 밤 TV화면으로 보이는 대성당의 모습은 나에게 전혀 의미없다. 무심히 시간을 흘려보내버리기 마련이다. 맹인의 안내에 따라 그림을 그려본다. 어린시절 이후 시도해 본 적 없는 그리기라는 행위를 하는 순간, 하고 난 후 나는 대성당에서 의미를 깨닫는다.
러스킨은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하여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에서 재인용〕.’라고 말한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유이고 의미없어 보이는 것을 의미있게 만드는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