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천명관의 <고래>를 읽다.

줌마시민 2023. 6. 22. 18:30

고래와 개망초

 

금계국이 지고 나는 자리에 개망초들이 차지하고 있다. 안개꽃 무리같은 꽃들이 개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무심하게 보곤 하던 개망초들을 이제는 다른 감정으로 보게 된다.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읽고 나서부터 개망초를 보면 춘희가 생각난다. 오감을 통한 놀라운 감수성을 가진 그러나 큰 체격과 두드러지는 외모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그녀. 갖은 고통을 겪고 돌아온 어린시절의 장소에서 사람들이 떠난 그 곳에 보초병들이 줄 서듯 만개해 있던 개망초들이 연상된다. 제목이 고래가 아니라 개망초였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고래는 춘희의 생물학적 엄마(우리에게 익숙한 모성애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금복이 고향 산골마을을 떠나 처음으로 목격한 광경에서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상징이다. 추한 외모의 노파와 애꾼눈 딸, 금복과 그녀의 딸 춘희의 뫼비우스 띠처럼 얽히고 설킨 관계의 이야기이다.

 

극단적인 외모와 성격의 캐릭터들, 신화 같기도 전설 같기도 하고 과장과 허황된 이야기로 당혹스럽게도 한다. 흥행영화에서 볼 수 있는 통속적인 인물의 등장과 성격, 만화 같은 설정 등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이야기의 폭포아래 지루할 틈이 없다. 원시적이고 야만적이기도 하고 적나라한 묘사는 정신보다는 육체의 충돌에 치중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땀 냄새 진동하는 원시림에 있는 기분이다. 중간 중간 첨가되는 인물에 대한 작가의 해설 또는 독자(관객)를 향한 이야기의 환기 등은 글을 읽는다기 보다 한편의 만담극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도 한다. 시공간을 초월한 가상의 세계 같지만 몇몇 중요한 현대사의 사건들이 살짝 살짝 언급됨으로써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부두, 평대, 공장의 총 3부로 노파와 금복, 춘희의 서사로 이루어지지만 큰 줄기는 금복의 서사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사업가로서 부와 명예를 축적하고 연애사로도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넘나드는 상상초월의 금복은 소녀시절 깊게 각인된 고래형상을 대극장 외형으로 구현하고 영화같은 삶을 마감한다.

 

세 인물중 나는 춘희에게 상대적으로 감정이입이 된다. 노파와 금복이 평탄하지 않은 삶에도 각자의 욕망과 복수를 능동적으로 행동하며 살아갔다면 태어날 때부터 탁월한 감수성을 갖고 있으나 말을 하지 못하고 타인과의 교감에 어려움이 있는 춘희는 방어기제로써만 공격적인 행동을 취할 뿐이었다. 물질을 향한 또는 타인의 관심을 향한 집착으로 악착같은 삶을 살았던 노파와 금복은 사고로 영화롭지 않은 죽음을 맞는다. 편견과 타인의 오해로 쌓아올린 의심의 성에 의해 고통 받던 춘희는 생경한 사랑의 감정과 행복의 씨앗을 잉태했지만 그는 떠나고 아이와의 궁핍한 생존의 링에 다시 올랐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대체할 수 없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선사한 아이를 잃은 춘희는 스스로 먹는 행위를 중단하고 죽음을 기다린다. 수개월이 흐르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서 벽돌을 만들기 시작한다. ,불행의 원인, 대상에 연연함이 없이 한때 왁자지껄하게 사람들로 붐볐던 이제는 버려진 공장터에서 묵묵하게 벽돌을 만든다. 그녀의 몸이 쇠해질수록 벽돌은 더욱 우수한 품질로 생산된다. 백킬로그램이 넘는 육중한 몸이 30킬로그램이 될 때까지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후에 어느 건축가에 의해 벽돌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받게 되지만 그녀 생과는 상관없는 말이었다. 슬픔을, 절망을 육체적 고통으로 대체하는 수련의 과정일지 벽돌을 만드는 것이 그녀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 힘든 일을 홀로 끝까지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개인의 영화를 위한 수단으로 벽돌을 만드는 일에 집중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다.”

 

사형수인 감방 동료는 이렇게 말하면서 매일 매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청소를 한다. 춘희 역시 침묵속에서 매일 매일 벽돌을 만들어 갔다.